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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카엘 하네케 <피아니스트> 분석
    취미/영화 2018. 6. 23. 13:15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고통이나 폭력 등의 불편한 이미지를 직설적이고 집요하게 표현한다는 점이다.자극적인 비주얼은 삼류영화에서 관객의 시선끌기용으로도 자주 보던 것들이지만,비주얼이 서사적인 개연성과 타당성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관객들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넘어선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이번 리뷰에서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유명한 두 장면인 강간 신과 화장실 신의 서사적 개연성과 타당성을 분석할 것이다.

     

     

     

     

    '에리카는 엄마가 갇힌 방 바깥에 있는 거실에서 제자인 클레메에게 폭행 후 강간당한다.'

     

     잘못된 소통으로 인해 두 주인공의 관계가 파국을 맞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이 느끼는 에리카에 대한 연민이 그토록 강렬한 이유는 냉혈한처럼 보이던 그녀가 사실은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에리카는 영화 속에서 강간당하기를 원했지만 결국은 피해자가 되었다.

     에리카를 강간한 클레메를 그저 나쁜놈으로만 볼 수 있을까? 클레메는 에리카를 사랑하게 된 후 자신의 학업도 포기하고 그녀의 학교에서 입학시험을 볼 정도로 에리카를 적극적으로 사랑한 인물이었다. 그가 에리카에게 원했던 것은 단지 대화를 통한 인간적인 소통과 공원에 같이 외출하자는 것뿐이었다.둘의 관계에서 줄곧 이기적이었던건,그래서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었던건 에리카였다.그녀는 대화하자는 클레메의 요구를 쌀쌀맞게 거절했고 클레메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따라주기를 원했다.강간 당하기를 원했던 것도 에리카였다.적극적인 클레메와 소극적인 에리카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엇나가는 동안 세 번의 섹스는 각기 다른 이유로 제대로 끝난 적이 없었다.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에리카에 대한 사랑과 혐오 사이에서 클레메의 이성을 잃게 만든 것이다.요컨대 에리카는 클레메와 제대로 된 소통은 하지 않은 채 클레메에게 어머니 앞에서 강간당하고자 하는 자신의 취향을 요구했으며 클레메는 에리카에 대한 사랑과 혐오 사이에서 성욕의 충족을 방해받으면서 결국 둘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막상 에리카가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그녀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다.그 이유는 그녀의 차갑고 냉소적인 성격 안에 타인의 반응에 안절부절 못하는 여린 내면이 있었기 때문이다.칼날같이 차가워보이던 그녀의 본성은 클레메에게 자신의 취향을 고백한 이후 안절부절 못하며 그에게 처절하게 매달리는 모습과,강간을 당해도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그저 몸으로 삭이는 장면에서 드러난다.우리는 그 장면에서 에리카의 쌀쌀맞은 성격이 자신의 본성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였으며 그녀가 사실은 연약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그리고 에리카의 성장 배경에는 딸의 교양과 정숙을 강요하던 어머니가 있었다.평생 자식에게 엄격했던 아버지의 눈물을 볼 때 더 슬프듯이 겉으로 모질고 냉정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처절하게 무너질 때 더 불쌍한 법이다.그리고 그 성격이 사실은 트라우마로부터 비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인물에게 느끼는 연민은 더욱 커질 것이다.여기서 강간이라는 설정은 평생 어머니에게 억압받고 자란 사람이 역설적으로 어머니 앞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억압당하는 성적 판타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평생을 억압당해 온 사람이 그 반작용으로 해방이 아닌 더욱 더 처절한 억압을 원하게 됐다는 것.안타까운 아이러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에리카는 나이도 많고 돈도 버는데 왜 엄마를 벗어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엄마는 딸의 인생을 망쳐버려 벗어나야만 하는 나쁜 사람일 뿐일까?엄마는 나쁜 사람이기 이전에 불쌍한 사람이다.에리카의 아버지는 정신병원에서 미쳐 죽었다.이것은 집에서 여자를 보호해줄 남자가 없다는 것이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몫까지 해내야 했다는 것이다.그녀가 화려한 원피스를 산 딸에게 악담을 퍼붓고,딸이 전화하지 말라고 해도 굳이 퇴근시간마다 전화를 하는 것은 딸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이 트라우마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듯 모녀관계도 그런 것이 아닐까?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던 모녀가 다음장면에서 '우린 가족이니까.'라며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화해하는 오프닝은 둘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듯 에리카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한다.그래서 어머니가 싫어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결과적으로 딸의 강간을 보게 된 원인이 딸에 대한 과보호와 지나친 간섭에서 비롯된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슬픈 아이러니다.

     

     

     

     

    '화장실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격정적으로 키스한다.'

     

     남녀가 함께 사용할 수 없는 공간에서,장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두 인물은 관객들의 시선을 끈다.화장실은 클레메의 적극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공간이다.클레메는 자신의 입학을 반대했고,이후에도 자신을 냉랭하게 대하는 에리카가 들어간 여자화장실에 제발로 들어가 그녀가 볼일을 보고 있던 칸의 잠긴 문을 열어 그녀에게 키스한다. 에리카는 여기서 클레메의 감정이 단순한 호감 이상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후 그녀를 감싸고 있던 두꺼운 껍데기가 깨지고 그녀가 갖고 있던 욕망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화장실이라는 장소의 서사적인 근거는 바로 '에리카는 긴장하면 오줌을 싼다.'는 것이다.자동차 극장 신에서 그녀는 한 커플이 섹스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다가 긴장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싼다.화장실이라는 장소적인 설정이 힘을 갖는 이유는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클레메의 적극성을 보여주면서 두 인물이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서사적 근거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단,두 인물이 화장실로 향하게 된 근거가 다소 빈약하다는 점이 아쉽다.에리카가 화장실로 간 것은 그녀가 긴장했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제자인 안나를 다치게 한 범인이 자신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과연 깨진 유리조각이 담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는 이유로 연주회를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이 다치기가 쉬울까?연주회장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에리카가 공개된 장소에서 큰 소리로 유리를 깼음에도 아무도 몰랐다는 설정은 넘어가가주더라도,피아노에 모든 것을 바친 피아니스트가 깨진 유리조각 때문에 최소 두 달의 치료기간이 필요하고 그마저도 완전히 회복될지 미지수인 상태로 다쳐버렸다는 설정은 다소 비약적으로 느껴진다.

     

     다만,이 설정을 위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꽤나 많았다는 것은 이해한다.

     1.충동적인 행동이어야 한다.-에리카에게 연민을 느끼기 위해서 계산된 행동이 아니어야 한다. 2.아무에게도 들키면 안된다.-이후의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3.그러므로 직접 다치게 해서도 안된다. 4.연주회장 안에서 벌어져야 한다.-이후 화장실 신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5.안나는 연주를 못할 정도로 다쳐야 한다. 6.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다치는 부위는 손이어야 한다.

    유리조각이 아닌 칼날과 같은 더 치명적인 물건이었다면 안나가 다친 이유가 그럴듯하게 설명되었을지도 모른다.

     

     에리카의 경우 그녀가 화장실에 갔던 이유라도 설정되었던 반면에 클레메는 그것마저 없었다.클레메는 어째선지 화장실에 간 에리카를 따라가 그녀에게 키스한다.이전까지 둘의 관계에 진전이 없었는데 화장실에 들어가 키스해버린 클레메의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인가?클레메가 에리카에게 키스했던 이유는 에리카가 자신을 받아줄거란 기대 혹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인데 그 전까지 둘의 관계는 그저 학생과 제자 사이에 지나지 않았으며 클레메는 에리카가 안나를 다치게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클레메의 갑작스런 행동은 그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근거가 부족해 그가 치기어린 청년 혹은 변태처럼 보이게도 했다.

     

     

     

     

     요컨대 강간과 화장실에서의 섹스는 각각 아이러니와 클레메의 적극성을 보여준다.자극적인 비주얼은 이야기 상에서 그것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그래야만 관객들이 본능적인 혐오감을 넘어서 논리로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당위적인 인물의 행동과 장소적 설정은 강렬한 비주얼 위에서 영화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영화 피아니스트에서는 그 설명이 타당한 편이지만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은 지점이 있어 아쉬움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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